연예인 백제 최후의 부흥 운동, 백강 전투와 삼국시대의 종식.jpg[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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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히헤헤햏ㅎ 댓글 0건 조회 813회 작성일 23-12-09 22:40본문


백강(백강구, 백촌강) 전투는 663년 8월에 신라의 백강(현재의 금강 하구 부근)에서 벌어진 백제·왜의 연합군과 신라·당의 연합군 간의 최후의 결전이다.

660년에 사비성이 점령 당하고 의자왕과 부여융이 수모를 당한 뒤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백제가 멸망했다. 그 후, 백제 남부에서 귀실복신, 승려 도침 등의 부흥군이 일어나 왜국에 머물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해 백제 부흥 운동을 개시하였다. 백제는 야마토에 지원을 요청했고, 야마토의 사이메이 덴노는 이에 응했다.
사이메이 덴노는 68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김유신을 필두로 한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맞붙어 계백이 전사하고 백제가 멸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사이메이 덴노는 당시 야마토에 머물러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백제로 돌려보내 백제부흥운동의 수장으로 옹립되도록 도와주고 병력 파병을 약속한다.
일본서기는 백강구 전투 파병의 동기를 <복신의 뜻에 따라>라고 적고 있는데, 귀실복신은 부흥운동의 총대장이다. 또 구당서에는 <부여풍지중>...<당시 일본군은 부여풍의 무리다>라고 적는 등 명백히 백제 지원을 위해 참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가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해왔다. 그들이 우리에게까지 지원 요청을 한 것을 보면 나라가 망하여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다는 뜻이다. 그들의 위태로운 상황을 돕고, 백제의 끊어진 왕통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거리에서 산속에서 창을 베개 삼아 싸우며 쓸개를 먹는 것과 같은 참담한 상황이니 그들의 이 절박한 뜻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 여러 장군에게 명하노니, 백제를 위해 출병하라. 구름처럼 번개처럼 백제 땅으로 진격해 그 원수를 쳐서 백제의 긴박한 고통을 덜어주리라."
661년 2월 사이메이 덴노는 현재의 나라현에 해당하는 혼슈의 야마토노쿠니(大和)의 수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출발하여 세토내해를 가로질러 현재의 에히메현에 해당하는 시코쿠의 이요노쿠니(伊予) 니키타진(熟田津)의 임시 궁인 이와유노카리미야(石湯行宮)에 정박하였다가 5월에 현재의 후쿠오카현에 해당하는 규슈의 츠쿠시노쿠니(筑紫)의 임시궁인 아사쿠라노타치바나노히로니와노미야(朝倉橘庭宮)에 도달하였다.
황태자인 나카노오에 황자와 조정 문무백관들도 같이 따라왔다는 것으로 보아 거의 정부 소재지를 옮긴, 천도에 준하는 수준이였다.
이와 별개로 외세의 침공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사 최초로 외세 방어 목적을 위한 요새들을 건설한다. 당시 야마토는 백제와 긴밀한 사이였던지라 부흥 운동이 실패하면 나당연합군이 칼끝을 돌려 자국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니키타스에서 배를 타려고 달이 뜨기를 기다린다. 마침 둥그런 달이 떠서, 물때도 딱 알맞구나. 자, 지금 저어 나가자."
(사이메이 덴노가 출전을 앞두고 지은 시다. 이는 사이메이 덴노의 파병 의지가 매우 강했음을 보여준다.)
661년 8월 사이메이 덴노가 아사쿠라노타치바나노히로니와노미야에서 사망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이 되면 국내 정세의 혼란으로 파병을 그만두지만, 나카노오에 황자는 심지어 즉위식을 몇 년이나 미루면서까지 병력 파견부터 우선하였다.
나카노오오에 황자(본명 가쓰라기)는 조메이 덴노와 고교쿠 덴노의 아들인데, 아버지인 조메이 덴노부터 아스카에 있는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왜의 유수의 호족 소가(蘇我) 일족과 긴밀한 통혼 관계에 있던, 백제인들과 혈통적으로 가까운 천황이었다. 오미 신궁에는 덴지 덴노가 직접 만든 해시계가 봉안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백촌강, 즉 백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제1군: 부여풍을 호위하기 위한 1만 선발부대. 선박 170여 척. 661년 5월 출발.(지휘관: 아즈미노 히라후, 사이노 아치마사, 에치노 다쿠쓰)
제2군: 군의 주력 2만 7천. 662년 3월 출발.(지휘관: 카미츠케누노기미노 와카코, 아베노 히라후)
제3군: 이오하라기미(廬原君)가 이끄는 1만여 인. 663년 8월 출발.
이후 전투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8월 13일, 부여풍이 기다리던 1,000척에 달하는 왜의 지원군이 도착해 백제부흥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주류성 밖에서 포진, 나당연합군의 진격을 막고자 했다.
8월 17일, 나당연합군의 선봉대였던 신라의 정예 기병은 백강 인근에서 진을 치고 왜 선단을 호위하고 있던 백제의 기병대를 향해 돌격했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패배해 물러나게 되었고 상륙을 준비하던 왜 선단 또한 모두 후퇴하게 된다.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백제 부흥군에게는 뼈아픈 패배였는데 주력군으로 활용될수 있던 왜군이 상륙조차 하지 못하고 후퇴했다는 점, 그리고 왜의 합류를 지연시킨 나당연합군이 왜군을 신경쓰지 않고 주류성을 공격할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줬다는 점이다.
8월 27일, 퇴각했던 왜군이 백강 하구에 다시금 출현한다. 왜군의 선발대가 당군을 상대로 도발을 하자, 이에 당군이 왜군을 향해 돌격하게 되고 왜군 선발대는 크게 패배하고 만다.
8월 28일, 왜군과 부여풍은 다시 나당연합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아마 나당연합군의 포위를 풀기 위해선 어떻게든 왜의 병력이 이들을 유인해 격파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듯 한데 문제는 조급함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명 포위가 길어질수록 주류성은 버티기 힘든 상황에 이르게 될테기에 반드시 해야할 작전이었지만 기상을 염두해두지 않고 어떻게든 공격만을 생각한 것이다. 또한 이들은 견고하게 진이 쳐져있는 당군의 진영을 향해 돌격했는데, 전력을 다해도 승리 여부를 점칠 수 없던 전투에서 조급함, 갈등, 악화된 기상 등이 여러 겹치며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장을 스스로 만들어 버린 셈이 되었다.
백제-왜 연합군의 병력 중 부여풍이 이끄는 왜 수군 10,000명은 진을 짜고 기다리고 있던 당군을 향해 돌격했다. 당군은 이때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왜 수군의 양측을 포위한 후 그들을 둘러싼 진형을 구축했다. 총 4차례의 전투가 진행된 백강에서의 전투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바뀌게 된다. 유인궤의 당수군은 수천 척의 왜 선단을 포위하고 불화살을 쏘며 맹렬하게 공격했고 이에 당황한 왜 선단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으나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가 없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볼 수 있듯이 촘촘한 포위망을 푸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결국 왜군은 뜨거운 불길과 당군의 돌격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만다.
이 전투의 막바지에 부여풍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고, 주류성을 버리고 고구려로 망명하고 만다. 그리고 9월 8일, 주류성을 지키던 백제 부흥군은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항복하고 만다. 이로써 백제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백강 전투는 나당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나당 연합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완패했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이 승리하면서, 백제의 잔존 저항 세력들은 사실상 완전히 소멸하였으며 살아남은 백제 부흥군의 지도자들은 고구려 및 왜국으로 망명했다.
백강전투
날짜
663년 8월 27일~8월 28일
장소
백강 부근
결과
나당연합군의 승리, 백제 저항 세력의 소멸
교전국
나당연합군 / 백제 부흥군, 왜국 지원군
병력
신라군: 병력 규모 불명
당군: 17,000여명, 함선 170여척
백제부흥군: 병력 규모 불명
왜국 지원군: 42,000여명, 함선 800~1000여척
피해 규모
나당연합군: 불명
왜국 지원군: 함선 400여척 손실, 왜군 10,000여명 전사, 전마 1,000여필 손실
백제 부흥군: 전멸
이 전투의 결과로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으며, 역사에서 백제의 이름은 잠시 후백제가 등장하긴 했지만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신라는 백제를 합병하였으며, 또한 당나라와 함께 신라는 북쪽과 남쪽에서 고구려를 포위하고 압박할 수 있게 되어 삼국통일에 크게 다가섰다.
고구려는 남쪽에서 신라를 견제하던 백제가 사라지면서 북쪽과 남쪽에서 당나라와 신라를 상대하는 양면전선을 강요받게 되면서 국방에 극심한 부담을 받게되어 멸망의 단초가 시작되었다.
야마토의 손실은 엄청났다. 백강 전투는 전근대 일본 역사상 최대의 패배였다.야마토는 핵심 동맹국인 백제를 잃었고, 나당연합군이 칼끝을 돌려 자국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해 국력 강화, 정치체제의 개혁과 법률의 발전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후 급격한 변화로 야마토 조정에서 극심한 갈등이 빚어졌고, 그 결과 진신의 난이 발발하였다. 내란은 덴무 천황의 승리로 이어졌고 이후 덴무 천황의 왕권이 극대화되며 중앙 집권화가 진행됐다. 701년 다이호 율령에 따라 왜국,야마토는 "일본"으로 국명을 변경했다.
이 전투의 승패로 "삼국시대"라는 역사의 한 장이 넘어가고 향후 1500여년간의 동아시아 질서와 판도가 정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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