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총국지) 중국 최후의 군벌, 성전을 이끌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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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18회 작성일 25-01-18 20:26본문
오늘의 주인공,마후산(馬虎山, 1910-1954)
서북군벌/신강군벌의 일원으로
본래 간쑤성에서 활동했지만
마가군벌의 천재 장군,
마중잉의 신강 원정에 합류하면서
자연스레 신강성 남부를 새로운 거점으로 마련,
신강군벌이 됐음
사실 다른 활동은 제쳐두고
중국의 마지막 군벌로써 유명한데
한번 마후산에 대해 아라보자
1)신강의 이슬람 모더니스트
수틀리면 다 죽이는 스타일의 마중잉과 달리
마후산은 우리 같은 이방인이 살아남기 위해선
신강성 현지인들의(한족ㆍ위구르족) 협조가
필수적이라 판단
동튀르키스탄 공화국 수립을 돕는 등
현지인 친화 정책을 펼쳤고,
덕분에 마후산의 군대는 성공적으로 신강 남부에 정착했음
또한 당시 소련이랑 놀아 적대적인
신강 군벌의 성스차이와 공존을 선택,
모종의 이유로 실종된 마중잉의 군대를 흡수한 뒤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에 절대적 충성을 맹세하여
본인 군대를 국민혁명군 제36사단으로 재편성했음
이후 지역 폐습 타파, 이슬람 모더니즘에 입각한
근대적 교육제도 도입 등 지역 발전에 힘쓰는 한편
난징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아
성스차이 및 소련 영향력을 상대하는
교두보 역할을 자처했으며
동시에 위구르인 부대를
편성 후 중일전쟁에 파견하는 등등
규모는 작은 군벌이었지만
나름 복잡한 일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음
2)붉은 홍수
1949년, 대륙은 사실상 공산당에 짓밟혔고
남은 영토라곤 서북지대 후이족 군벌과
이곳 신강성, 그리고 티베트 뿐이었음
그러나 남은 잔존 세력들도
하나둘씩 대세에 굴복하여 항복했는데,
신강성 또한 마찬가지라
위구르인 저명 인사들이 속속 공산당에 합류하는 등,
사실상 국민당은 전멸 수순에 들어갔음
그러나 마후산은 포기하지 않았음,
곧 대만의 국민혁명군이 돌아와
대륙 탈환에 나설 것이라 판단했고
그딴 거 없어도 공산당 발 밑에
사느리 차라리 죽겠다는 마인드였음
물론 본인도 이게 자살공격임을 잘 알아서,
전투 준비에 앞서 줄곧 생사를 함께한 간부들과 회의를 했고
모두의 동의를 얻어 전쟁을 결정 1950년,
공산군을 공격하며 일명 '국민당 회족 봉기' '서북전쟁' 등등으로 불린
일련의 게릴라전이 시작됨
의외로 마후산이 봉기하자
간쑤ㆍ칭하이ㆍ닝샤 등등 후이족 다수 지역에서
동조 봉기가 발생했으며
전국 각지의 국민혁명군 잔당ㆍ패잔병들도 합류하면서
순식간에 규모가 20만에 육박했음
이 소식은 대륙에도 전해져 한족 다수 지역들에서도
국민혁명군 잔당을 위주로 중~소규모 봉기가 발생했고
특히 버마로 임시 대피한 리미 장군의
4만 병력이 다시금 운남성을 공략하는 등
차라리 죽겠다! 마인드로 봉기한
마후산의 작은 반란은
순식간에 3~40만 규모의 대봉기로 거듭났음
3)진압
그러나 50년대 중공군은
린뱌오,주더 같은 명장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던 시기였었다.
각지에서 발생한 짜잘한 봉기들은 곧장 진압됐고
버마에서 북진하면 리미 장군은 병력 및 물자 부족으로
금방 패퇴했으며
대만의 국민당 정부도
한참 멀리 떨어진 서북에 물자를 대주었지만
군사적으로 지원할 처지가 아니었음
마후산의 군대 또한 사방이
소련ㆍ중공인 상황이라
물자 부족에 시달렸으며
비록 그런 상황에서도 중공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1953년 즈음,
반군 주력이 붕괴하고
마후산은 완전히 게릴라전으로 전락했음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54년,
끝내 마후산은 생포되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름 군벌들에 대해 관대하던
공산당의여러 차례 회유 시도가 있었지만 전부 거부
국민혁명군 군복 차림으로 죽겠다 요구하여
생포됐을 때 차림 그대로 총살됐음
여튼 일개 군소군벌이 한때 서북 전체를 휩쓴 대봉기를 일으킨 것과
중국의 마지막 군벌이었다는 점에서
마후산은 은근 군벌역사에서 존재감이 있는 편임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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